함께 배우는 수업 · 한국사

한국광복군 창설과 국내 진공 작전

1940년 충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규 국군으로 창설된 한국광복군(지청천)! 김원봉의 조선의용대 합류로 이룬 좌우합작, 영국군과의 인도·미얀마 전선 참전, 그리고 미국 OSS와 준비한 국내 진공 작전을 배웁니다.

이 수업에서 해 볼 일

  • 한국광복군의 창설과 국내 진공 계획의 실행 여부를 구별한다

먼저 알면 좋은 것: 중일전쟁(1937) 발발과 임시정부의 충칭 정착(1940) · 김원봉의 조선민족혁명당과 조선의용대 창설(1938, 한커우) · 태평양전쟁(1941)과 연합국의 대일 전선

오늘의 목표

가입 없이 시작할 수 있어요. 설명을 읽고, 함께 연습한 뒤, 처음 보는 문제에서 직접 확인합니다.

판단 과정과 비교 사례

한국광복군은 1940년 충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창설했다. 임시정부의 정치적 목표와 부대의 군사 활동을 연결해 읽되 다른 시기의 독립군과 곧바로 같은 조직으로 보지 않는다.연합군 협력에는 전투뿐 아니라 정보·선전·훈련 활동도 포함된다. 인도·미얀마 전선 활동과 국내 진공 준비는 장소와 실행 단계를 구분해야 한다.계획서에 작전이 적혀 있어도 실행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국내 진공 작전은 준비 중 일본의 항복을 맞았으므로 계획·훈련·실행의 증거를 각각 확인한다.

1. 한국광복군의 창설(1940. 9)과 조선의용대 합류(좌우 통합)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 일제의 침략을 피해 8년간 중국 대륙을 이동하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마침내 1940년 9월 중국의 전시 수도인 충칭(重慶)에 정착했습니다. 주석 김구(金九)는 장제스 중국 국민당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바탕으로 1940년 9월 17일 임시정부의 정규 국군인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을 창설했습니다(총사령관 지청천, 참모장 이범석). 한편, 의열단 단장 출신인 김원봉(金元鳳)은 1938년 중국 관내(한커우)에서 최초의 한인 무장 부대인 조선의용대를 창설해 항일전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이후 조선의용대의 주력 부대(화북 지대)가 팔로군과 함께 싸우기 위해 화북 지역으로 북상(훗날 조선의용군으로 개편되어 호가장 전투 등에서 활약)한 뒤,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의용대 본대가 1942년 5월 충칭의 한국광복군에 전격 합류(제1지대로 편성, 김원봉은 광복군 부사령관 및 임시정부 군무부장 취임)했습니다. 이로써 한국광복군은 명실상부하게 민족주의 우익 세력과 사회주의 좌익 세력이 하나로 통합된 민족 단일 정규군으로 거듭났습니다.1938년 김원봉이 한커우에서 창설한 '조선의용대(중국 관내 최초의 한인 무장 부대)'의 분화 경로: ① 주력 부대는 화북으로 이동해 '조선의용군(윤세주·김무정, 호가장 전투)'이 되었고, ② 김원봉의 본대는 1942년 충칭 임시정부의 '한국광복군'에 합류하여 좌우합작 군대를 완성했습니다!

2. 한국광복군의 4대 핵심 군사·외교 활동 연대기

한국광복군이 창설 직후부터 1945년 8·15 광복 직전까지 전개한 주요 군사 작전과 외교적 성과를 연대기순으로 정리합니다.
연도주요 역사적 사건핵심 전개 내용 및 역사적 의의
1940. 9한국광복군 창설 (충칭)대한민국 임시정부 정규군으로 창설 (주석 김구, 총사령 지청천, 참모장 이범석), 기관지 『광복』 간행
1941. 12대일 선전포고문 발표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직후 일본과 독일에 공식 선전포고 발표 (연합국의 일원임을 천명)
1942. 5김원봉의 조선의용대 합류조선의용대 병력을 흡수하여 제1지대(김원봉)·제2지대(이범석)·제3지대(김학규)로 확대 개편, 병력 대폭 증강
1943. 8영국군과 인도·미얀마 전선 참전영국군의 요청으로 한영 군사 협정을 맺고 광복군 공작대(문응국 등 영어·일본어 능통 대원 9명)를 인도·미얀마(버마) 전선(임팔 전투 등)에 파견하여 일본군 암호 번역, 대적 선전 방송, 포로 심문 등 혁혁한 전공 수립
1944. 8광복군 행동준승 9개항 폐지초기 창설 때 중국 국민당 군사위원회가 광복군 통수권을 제약했던 불평등 조항을 폐지하고 독자적 작전 지휘권 완전 회복
1945. 4~8국내 진공 작전 (독수리 작전)미국 전략정보국(OSS)과 합작하여 광복군 제2·3지대 정예 대원들에게 낙하산 침투·폭파·무전 특수 훈련 실시 →\rightarrow 1945년 8월 말 국내 진공 작전 투입 직전 일제의 항복으로 미실행
한국광복군의 연합군 공동 작전 2대 키워드: ① 영국군과 함께 싸운 '인도·미얀마 전선 파견(1943)' ② 미국 전략정보국(OSS)과 합작하여 준비한 '국내 진공 작전(독수리 작전, 1945)'! 이 두 가지는 한국광복군 단독 문제에서 100% 출제됩니다.

3. 사료 포인트: 대일 선전포고문(1941)과 김구의 『백범일지』 탄식

한국광복군이 자주적 교전단체로서 연합국의 일원으로 당당히 목소리를 내기 위해 피땀 흘렸던 기록을 두 사료로 확인해 봅시다. > [사료 1: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일 선전포고 성명서 (1941. 12. 10)] > "우리 삼천만 한국 인민과 정부를 대표하여 삼가 중국·영국·미국·네덜란드·캐나다·호주 및 기타 여러 나라가 일본에 대하여 선전포고한 것이 일본을 격패시키고 동아시아를 재건하는 가장 유효한 수단이 됨을 축하하며, 다음과 같이 성명하노라. > 1. 한국 전 인민은 현재 이미 반침략 전선에 참가하였으니 한 개의 전투 단위로써 추축국(일본·독일·이탈리아)에 선전(宣戰)한다. > 2. 1910년의 합방 조약 및 일체 불평등 조약의 무효를 거듭 선포한다. > 4. 루스벨트·처칠 선언(대서양 헌장)의 각 조항을 한국 독립을 실현함에 적용할 것을 견결히 주장한다." > [사료 2: 김구의 『백범일지』 (국내 진공 작전 직전 일제 항복 소식을 듣고)] > "아! 왜적이 항복한다! 이것은 내게 기쁜 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었다. 천신만고로 수년간 애를 써서 참전할 준비(미국 OSS와의 국내 진공 작전)를 다 해놓은 것도 다 허사가 되고 말았다. 시안(서안)과 푸양(부양)에서 훈련받은 우리 청년들에게 여러 가지 비밀 무기를 주어 산둥에서 미국 잠수함에 태워 본국으로 들여보내려던 계획도, 우리가 이번 전쟁에 한몫 당당히 끼어 발언권을 얻으려던 것도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 →\rightarrow 우리 손으로 직접 한반도에 진격해 일본군을 몰아내지 못하면 전후 열강(미·소)에 의해 우리의 운명이 좌우될 것을 꿰뚫어 본 김구 주석의 뼈아픈 통찰이 담긴 사료입니다.

예제로 살펴보기

[실전 확인 문제] 1940년 충칭에서 창설된 '한국광복군'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지청천을 총사령관으로 삼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규 국군으로 창설되었다. ②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의용대 일부가 합류하여 좌우 연합의 민족 군대로 발전하였다. ③ 태평양전쟁 발발 직후 대일 선전포고를 발표하고 영국군의 요청으로 인도·미얀마 전선에 파견되었다. ④ 소련 적군의 지원을 받아 자유시로 이동하던 중 무장 해제를 강요당하는 참변을 겪었다.
  1. 정답: ④ 해설: 청산리 대첩 이후 일제의 간도참변을 피해 밀산에서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한 뒤 소련 영내 자유시(스보보드니)로 이동했다가 소련 적군에게 무장 해제를 당한 사건은 1921년 6월의 '자유시참변'입니다. ①, ②, ③과 미국 OSS 합작 국내 진공 작전 준비는 모두 1940년대 충칭 한국광복군의 핵심 활동입니다.
확인: 한국광복군은 1940년 9월 충칭에서 지청천을 총사령관으로 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규군으로 창설되었다.

참고 근거와 확인 범위

설명·예제·문제 구성 및 오류 수정 책임: 프리런. 위 자료는 표시한 주제를 확인하거나 더 읽기 위한 근거이며, 외부 기관의 공식 수업이나 감수본을 뜻하지 않습니다.

참고 자료 연결 점검: 2026-11-02. 제작 방식·검수 범위와 수정 기록에서 확인 범위를 볼 수 있습니다. 오류는 상단의 의견 보내기 또는 contact@freelearn.io로 알려 주세요.

이 단원의 개념서 읽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