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광복군 창설과 국내 진공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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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광복군의 창설(1940. 9)과 조선의용대 합류(좌우 통합)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 일제의 침략을 피해 8년간 중국 대륙을 이동하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마침내 1940년 9월 중국의 전시 수도인 충칭(重慶)에 정착했습니다. 주석 김구(金九)는 장제스 중국 국민당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바탕으로 1940년 9월 17일 임시정부의 정규 국군인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을 창설했습니다(총사령관 지청천, 참모장 이범석).
한편, 의열단 단장 출신인 김원봉(金元鳳)은 1938년 중국 관내(한커우)에서 최초의 한인 무장 부대인 조선의용대를 창설해 항일전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이후 조선의용대의 주력 부대(화북 지대)가 팔로군과 함께 싸우기 위해 화북 지역으로 북상(훗날 조선의용군으로 개편되어 호가장 전투 등에서 활약)한 뒤,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의용대 본대가 1942년 5월 충칭의 한국광복군에 전격 합류(제1지대로 편성, 김원봉은 광복군 부사령관 및 임시정부 군무부장 취임)했습니다. 이로써 한국광복군은 명실상부하게 민족주의 우익 세력과 사회주의 좌익 세력이 하나로 통합된 민족 단일 정규군으로 거듭났습니다.
한국광복군의 4대 핵심 군사·외교 활동 연대기
한국광복군이 창설 직후부터 1945년 8·15 광복 직전까지 전개한 주요 군사 작전과 외교적 성과를 연대기순으로 정리합니다.
| 연도 | 주요 역사적 사건 | 핵심 전개 내용 및 역사적 의의 |
|---|---|---|
| 1940. 9 | 한국광복군 창설 (충칭) | 대한민국 임시정부 정규군으로 창설 (주석 김구, 총사령 지청천, 참모장 이범석), 기관지 『광복』 간행 |
| 1941. 12 | 대일 선전포고문 발표 |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직후 일본과 독일에 공식 선전포고 발표 (연합국의 일원임을 천명) |
| 1942. 5 | 김원봉의 조선의용대 합류 | 조선의용대 병력을 흡수하여 제1지대(김원봉)·제2지대(이범석)·제3지대(김학규)로 확대 개편, 병력 대폭 증강 |
| 1943. 8 | 영국군과 인도·미얀마 전선 참전 | 영국군의 요청으로 한영 군사 협정을 맺고 광복군 공작대(문응국 등 영어·일본어 능통 대원 9명)를 인도·미얀마(버마) 전선(임팔 전투 등)에 파견하여 일본군 암호 번역, 대적 선전 방송, 포로 심문 등 혁혁한 전공 수립 |
| 1944. 8 | 광복군 행동준승 9개항 폐지 | 초기 창설 때 중국 국민당 군사위원회가 광복군 통수권을 제약했던 불평등 조항을 폐지하고 독자적 작전 지휘권 완전 회복 |
| 1945. 4~8 | 국내 진공 작전 (독수리 작전) | 미국 전략정보국(OSS)과 합작하여 광복군 제2·3지대 정예 대원들에게 낙하산 침투·폭파·무전 특수 훈련 실시 1945년 8월 말 국내 진공 작전 투입 직전 일제의 항복으로 미실행 |
사료 포인트: 대일 선전포고문(1941)과 김구의 『백범일지』 탄식
한국광복군이 자주적 교전단체로서 연합국의 일원으로 당당히 목소리를 내기 위해 피땀 흘렸던 기록을 두 사료로 확인해 봅시다.
"우리 삼천만 한국 인민과 정부를 대표하여 삼가 중국·영국·미국·네덜란드·캐나다·호주 및 기타 여러 나라가 일본에 대하여 선전포고한 것이 일본을 격패시키고 동아시아를 재건하는 가장 유효한 수단이 됨을 축하하며, 다음과 같이 성명하노라.
1. 한국 전 인민은 현재 이미 반침략 전선에 참가하였으니 한 개의 전투 단위로써 추축국(일본·독일·이탈리아)에 선전(宣戰)한다.
2. 1910년의 합방 조약 및 일체 불평등 조약의 무효를 거듭 선포한다.
4. 루스벨트·처칠 선언(대서양 헌장)의 각 조항을 한국 독립을 실현함에 적용할 것을 견결히 주장한다."
"아! 왜적이 항복한다! 이것은 내게 기쁜 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었다. 천신만고로 수년간 애를 써서 참전할 준비(미국 OSS와의 국내 진공 작전)를 다 해놓은 것도 다 허사가 되고 말았다. 시안(서안)과 푸양(부양)에서 훈련받은 우리 청년들에게 여러 가지 비밀 무기를 주어 산둥에서 미국 잠수함에 태워 본국으로 들여보내려던 계획도, 우리가 이번 전쟁에 한몫 당당히 끼어 발언권을 얻으려던 것도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우리 손으로 직접 한반도에 진격해 일본군을 몰아내지 못하면 전후 열강(미·소)에 의해 우리의 운명이 좌우될 것을 꿰뚫어 본 김구 주석의 뼈아픈 통찰이 담긴 사료입니다.
정답: ④
해설: 청산리 대첩 이후 일제의 간도참변을 피해 밀산에서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한 뒤 소련 영내 자유시(스보보드니)로 이동했다가 소련 적군에게 무장 해제를 당한 사건은 1921년 6월의 '자유시참변'입니다. ①, ②, ③과 미국 OSS 합작 국내 진공 작전 준비는 모두 1940년대 충칭 한국광복군의 핵심 활동입니다.
핵심 요약
- ✓한국광복군은 1940년 9월 충칭에서 지청천을 총사령관으로 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규군으로 창설되었다.
-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직후 대일 선전포고문을 발표하여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교전권을 천명했다.
- ✓1942년 김원봉의 조선의용대 본대가 광복군에 합류함으로써 좌우합작의 단일 민족 무장력을 구축했다.
- ✓영국군과 함께 인도·미얀마 전선에 참전하여 전공을 세웠고, 미국 OSS와 합작하여 국내 진공 작전(독수리 작전)을 준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