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국 시대의 전개 (통일신라와 발해)
유물과 표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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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 중대 전제 왕권의 확립 (무열왕~혜공왕)
삼국 통일을 전후하여 신라 중대(무열왕~혜공왕)에는 진골 귀족 세력을 억누르고 김춘추(태종 무열왕) 직계 자손들이 왕위를 독점하며 강력한 전제 왕권을 확립했습니다. 특히 문무왕의 뒤를 이은 신문왕(神文王, 재위 681~692)은 통일신라의 통치 체제를 완성한 핵심 군주입니다.
고구려를 계승한 해동성국 '발해(698~926)'의 발전과 통치 체제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 영주(잉저우)로 강제 이주당했던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이끈 고구려 장군 출신 대조영(大祚榮, 고왕)은 당군의 추격을 천문령에서 격파하고 길림성 돈화 동모산 기슭에서 698년 발해(초기 국호 진[震])를 건국했습니다. 이로써 남쪽의 통일신라와 북쪽의 발해가 공존하는 남북국 시대가 열렸습니다(조선 후기 실학자 유득공이 『발해고』에서 최초로 정립).
| 발해 국왕 (재위) | 독자 연호 | 대외 관계 및 영토 확장 | 대내 통치 체제 및 문화적 특징 |
|---|---|---|---|
| 고왕 (대조영) (698~719) | - | 천문령 전투 승리 후 동모산에서 건국 (698) | 고구려 유민(지배층)과 다수의 말갈족(피지배층) 결합 |
| 무왕 (대무예) (719~737) | 인안(仁安) | 흑수말갈과 당의 연결을 차단하기 위해 장문휴 수군을 보내 당의 산둥반도 등주(登州) 선제공격, 요서 지역에서 당군과 격돌, 일본에 국서 발송 | 북방 영토 확장, 당·신라를 견제하기 위해 돌궐·일본과 친교(북방 연대 외교) |
| 문왕 (대흠무) (737~793) | 대흥(大興) 보력(寶曆) | 당과 친선 관계 수립(문물 수용), 신라와도 상설 교통로인 '신라도체(신라도)' 개설 | 수도를 중경 상경 용천부 동경으로 천도, 3성 6부제 및 주자감 정비, 정혜공주·정효공주 묘 조성 |
| 선왕 (대인수) (818~830) | 건흥(建興) | 말갈족 대부분 복속, 요동과 연해주, 한반도 북부(대동강~용흥강)까지 최대 영토 확보 | 5경 15부 62주 지방 행정 완성, 중국으로부터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불림 |
사료 포인트: 발해의 고구려 계승 증거와 유득공의 『발해고』
중국 동북공정의 역사 왜곡에 맞서 발해가 당나라의 지방 정권이 아닌 고구려를 계승한 자주적 한국사 국가임을 입증하는 사료와 유물을 정리합니다.
"무예(무왕)는 삼가 아룁니다. ...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고(復高麗之舊居) 부여의 전통(유속)을 이어받았으나(有扶餘之遺俗), 천애가 길고 아득하여 소식을 전하지 못하였습니다."
발해 스스로가 고구려 계승국임을 천명한 기록이며, 일본 또한 발해 사신을 '고려(고구려) 사신'이라 불렀습니다.
"고려가 발해사를 편찬하지 않은 것은 큰 잘못이다. 부여씨가 망하고 고씨가 망하자 김씨(신라)가 남쪽을 차지하고 대씨(발해)가 북쪽을 차지하여 남북국(南北國)이라고 하였다. 마땅히 남북국사가 있었어야 했는데 고려가 이를 편찬하지 않아 북쪽 땅(만주)을 잃어버렸다."
정답: ④
해설: 발해는 당의 3성 6부제를 수용하면서도 정당성(대내상) 중심으로 운영하고, 좌·우사정이 6부를 이원적으로 나누어 통할하며, 6부의 명칭을 유교 덕목인 '충·인·의·지·예·신'으로 붙이는 등 발해 고유의 독창성을 발휘하였습니다.
핵심 요약
- ✓통일신라 신문왕은 김흠돌의 난을 진압하고 집사부 기능을 강화했으며, 관료전 지급·녹읍 폐지, 국학 설립, 9주 5소경·9서당 10정을 완비했다.
- ✓발해는 698년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이끌고 동모산에서 건국하여 남쪽의 신라와 함께 남북국 시대를 열었다.
- ✓발해 무왕(인안)은 당의 등주를 공격했고, 문왕(대흥)은 당·신라와 교류하며 3성 6부제를 정비했으며, 선왕(건흥) 때 5경 15부 62주의 해동성국을 이룩했다.
- ✓일본에 보낸 국서('고구려 옛 땅 회복')와 온돌, 수막새 기와, 정혜공주 묘의 모줄임천장 돌방무덤은 발해의 고구려 계승성을 명확히 입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