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오군란(1882)과 갑신정변(1884)
유물과 표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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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 정책의 추진과 임오군란(1882. 6)의 발발·결과
1876년 개항 이후 고종과 민씨 정권은 근대적 개혁을 총괄하는 기구로 통리기무아문(1880)을 설치하고, 신식 군대인 별기군(別技軍, 일본인 교관 호리모토 초빙)을 창설했으며, 일본에 수신사와 조사시찰단(1881, 암행 파견), 청나라에 영선사(1881, 김윤식 인솔 - 귀국 후 기기창 설립)를 파견했습니다. 그러나 개화 자금을 마련하느라 세금을 늘리고 일본으로 쌀이 무제한 유출되면서 쌀값이 폭등해 도시 빈민과 구식 군인들의 불만이 폭발 직전에 이르렀습니다.
온건개화파 vs 급진개화파 분화와 갑신정변(1884. 12) 비교
임오군란 이후 청의 내정 간섭이 극심해지자 개화파는 개혁의 모델과 외교 노선을 두고 온건개화파와 급진개화파로 갈라졌고, 급진개화파가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1884. 12. 4)을 기해 정변(갑신정변)을 일으켰습니다.
| 비교 항목 | 온건개화파 (김홍집·김윤식·어윤중) | 급진개화파 / 개화당 (김옥균·박영효·홍영식·서광범·서재필) |
|---|---|---|
| 사상적 기원·모델 | 청의 양무운동(중체서용) 모델 | 일본의 메이지 유신(문명개화론) 모델 (박규수·유대치·오경석 영향) |
| 핵심 개혁 노선 |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 유교적 전통 질서와 성리학 체제(도)는 지키면서 서양의 과학 기술(기)만 점진적으로 수용 | 서양의 과학 기술뿐만 아니라 정치 체제(입헌군주제)와 사회 신분 제도까지 근본적으로 변혁해야 한다고 주장 |
| 대청 외교 입장 | 청과의 전통적 사대 우호 관계를 유지하며 점진적 개혁 추구 | 청에 대한 사대 관계 청산(자주독립) 및 일본의 재정·군사적 지원 활용 |
| 갑신정변의 전개 (1884. 12) | 정변에 반대 | 청·프 전쟁으로 한양의 청군 절반이 철수하고 김옥균의 일본 차관 도입이 실패하자, 일본 공사 다케조에의 군사 지원 약속을 믿고 우정총국(근대 우편 기구) 개국 축하연에서 정변 단행 개화당 정부 수립 및 14개조 개혁 정강 발표 청군(위안스카이)의 무력 개입과 일본군의 배신으로 3일 만에 진압(삼일천하) |
사료 포인트: 갑신정변 14개조 개혁 정강과 역사적 의의·한계
비록 3일 만에 끝났으나 근대 국민 국가 수립을 지향한 최초의 정치 개혁 운동이었던 갑신정변의 14개조 혁신 정강(김옥균의 『갑신일록』 수록)을 사료로 확인해 봅시다.
정답: ③
해설: 김옥균, 박영효 등 급진개화파는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1884)을 기회로 갑신정변을 일으켜 청에 대한 사대 청산, 문벌 폐지·인민 평등권, 호조로의 재정 일원화 등을 담은 14개조 개혁 정강을 발표했습니다. ①과 ②는 임오군란(1882), ④는 을미개혁(1895)에 대한 설명입니다.
핵심 요약
- ✓임오군란(1882)은 개화 정책과 별기군에 대한 구식 군인·도시 빈민의 반발로 일어났으며, 제물포 조약과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 체결로 이어졌다.
- ✓김옥균·박영효 등 급진개화파는 메이지 유신을 모델로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에서 갑신정변(1884)을 일으켰다.
- ✓갑신정변 14개조 정강은 청에 대한 조공 폐지, 문벌 폐지·인민 평등권, 지조법 개혁, 호조 재정 일원화, 내각 중심 정치를 표방했다.
- ✓갑신정변은 청군의 개입으로 3일 만에 실패하고 한성 조약·톈진 조약이 체결되었으나, 근대 국민 국가 수립을 지향한 최초의 정치 개혁 운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