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림의 등장과 4대 사화 (훈구 vs 사림)
유물과 표본
사진은 출처와 이용 조건을 확인한 경우에만 표시합니다.
사진 출처·이용 조건 확인 중
훈구파 vs 사림파의 대립과 사림의 중앙 정계 진출 (성종 대)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는 과정(계유정난)에서 공을 세운 신숙주, 한명회 등 공신 세력은 막대한 토지와 노비를 받고 고위 관직을 독점하며 훈구파(勳舊派)를 형성했습니다. 이에 맞서 고려 말 정몽주·길재의 학통을 이어받아 경상도(영남) 등 지방에서 성리학 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쓰던 중소 지주 출신 학자들을 사림파(士林派)라 부릅니다.
성종은 비대해진 훈구 대신들을 견제하기 위해 김종직(金宗直)을 비롯한 사림 세력을 중앙 정계, 특히 언론 기관인 3사(사헌부·사간원·홍문관)의 관직에 대거 등용했습니다. 3사에 포진한 사림은 성리학적 도덕성과 왕도 정치를 내세워 훈구 대신들의 비리와 부정부패를 날카롭게 탄핵했고, 이에 위기감을 느낀 훈구파가 반격에 나서면서 사림이 큰 화를 입는 네 차례의 사화(士禍: 선비들이 입은 화)가 일어났습니다.
| 비교 항목 | 훈구파 (勳舊派) | 사림파 (士林派) |
|---|---|---|
| 형성 배경 및 기반 | 세조 즉위 공신, 중앙 고위 관료(의정부·6조), 대지주 | 길재·김종직 학통 계승, 지방(영남·기호) 중소 지주, 언론 3사 진출 |
| 정치·사상적 지향 | 부국강병과 중앙집권 중시, 성리학 외에 불교·도교·과학 기술에도 포용적 | 성리학 이외의 사상을 이단으로 배척, 왕도 정치와 향촌 자치(향약) 강조 |
4대 사화(무오·갑자·기묘·을사사화)의 원인과 전개 비교
연산군 때부터 명종 때까지 약 50년간 일어난 4대 사화(무·갑·기·을)의 발생 원인과 핵심 키워드를 정확히 구분해 봅시다.
| 사화 명칭 (연도) | 재위 국왕 | 발생 원인 및 핵심 사건 전개 | 역사적 결과 및 특징 |
|---|---|---|---|
| 무오사화 (戊午士禍) (1498) | 연산군 | 성종실록을 편찬하던 중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이 작성한 사초(史草)에 스승 김종직이 세조의 단종 왕위 찬탈을 초나라 항우의 의제 살해에 빗대어 비판한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실은 것을 훈구파 유자광이 고발 | 김종직 부관참시, 김일손 등 신진 사림 대거 처형 (사초가 원인이 되어 '사화[史禍]'라고도 함) |
| 갑자사화 (甲子士禍) (1504) | 연산군 |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 사사 사건의 전말이 밝혀지자, 연산군이 복수와 왕권 강화를 위해 폐비에 찬성했던 훈구파와 사림파를 가리지 않고 대거 숙청 | 연산군의 폭정 심화(경연 폐지, 사간원 폐지, 언문 사용 금지) 중종반정(1506)으로 연산군 폐위 |
| 기묘사화 (己卯士禍) (1519) | 중종 | 중종이 훈구 공신을 견제하기 위해 등용한 사림의 영수 조광조(趙光祖)가 급진적인 도학 개혁 정치(위훈삭제, 현량과, 소격서 폐지)를 추진하자, 훈구파가 나뭇잎에 꿀로 '주초위왕(走肖爲王)' 글자를 새겨 모함 | 조광조 유배 후 사사, 급진 개혁 좌절 및 기묘사림 숙청 |
| 을사사화 (乙巳士禍) (1545) | 명종 | 왕위 계승을 둘러싼 외척 간의 권력 다툼: 인종의 외척인 대윤(윤임)과 명종·문정왕후의 외척인 소윤(윤원형)이 대립하여 소윤이 승리 | 대윤을 지지했던 사림 세력이 대거 화를 입음 (이후 문정왕후 수렴청정과 윤원형 전횡) |
사료 포인트: 서원·향약의 발달과 선조 대 동·서 분당(1575)
네 차례의 사화로 큰 타격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림이 끝내 살아남아 선조(宣祖) 때 정국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향촌 사회에 뿌리내린 서원(書院)과 향약(鄕約)이라는 두 가지 든든한 기반 덕분이었습니다.
"심의겸(서인)은 외척이었으나 사림을 보호한 공이 있었고, 김효원(동인)은 학문이 뛰어났으나 권세가 윤원형의 집에 머문 적이 있었다. 김효원이 이조 전랑에 천거되자 심의겸이 반대하였고, 이후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이 천거되자 김효원이 외척이라는 이유로 반대하면서 사림이 동인(이황·조식 문인, 신진 사림)과 서인(이이·성혼 문인, 기성 사림)으로 갈라졌다."
외척 정치 청산 문제와 3사 관원 선발권·후임자 추천권을 가진 요직인 이조 전랑(정5품 정랑·정6품 좌랑) 임명 문제가 맞물려 붕당 정치가 시작되었습니다.
정답: ④
해설: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어 연산군 때 '무오사화(1498)'의 원인이 된 인물은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입니다. ① 현량과 실시, ② 소격서 폐지, ③ 위훈삭제, 향약·소학 보급은 모두 중종 때 조광조가 추진한 개혁이며 이에 반발한 훈구파가 '주초위왕' 사건을 조작해 기묘사화(1519)를 일으켰습니다.
핵심 요약
- ✓성종 대 중앙 언론 3사에 진출한 사림파가 기득권 훈구파의 비리를 비판하면서 네 차례의 사화가 발생했다.
- ✓4대 사화는 무오사화(연산군, 조의제문 사초), 갑자사화(연산군, 폐비 윤씨), 기묘사화(중종, 조광조의 현량과·위훈삭제), 을사사화(명종, 대윤·소윤 외척 대립)이다.
- ✓사림은 지방의 서원(백운동 서원 → 최초의 사액 서원 소수서원)과 향약을 기반으로 세력을 키워 선조 때 정국을 장악했다.
- ✓선조 대 외척 정치 청산 방식과 이조 전랑 임명 문제를 계기로 사림이 동인(김효원, 이황·조식 학파)과 서인(심의겸, 이이·성혼 학파)으로 나뉘며 붕당 정치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