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의 개혁과 강화도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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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의 왕권 강화와 삼정(三政) 개혁 (1863~1873)
19세기 전반 안동 김씨 등 외척 가문의 세도 정치와 삼정의 문란(전정·군정·환곡)으로 농민 봉기(1811 홍경래의 난, 1862 임술 농민 봉기)가 끊이지 않고, 밖으로는 서양 이양선이 출몰하는 내우외환 속에서 1863년 12세의 고종이 즉위하자 국왕의 친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하응)이 섭정으로서 강력한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통상 수교 거부 정책(양요)과 강화도 조약(1876) 연대기
흥선대원군은 서양 열강의 통상 요구를 침략으로 규정하고 강력한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펼쳤으나, 1873년 대원군이 하야하고 고종이 친정을 시작한 뒤 일본의 운요호 사건(1875) 무력 도발을 계기로 강화도 조약(1876)을 체결하며 마침내 문호를 개방했습니다.
| 연도 | 주요 역사적 사건 | 핵심 전개 과정 및 결과 |
|---|---|---|
| 1866. 1 | 병인박해 |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려다 실패한 후 프랑스 선교사 9명과 천주교도 8천여 명 처형 |
| 1866. 7 | 제너럴 셔먼호 사건 |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통상을 요구하며 약탈을 자행한 미국 상선을 평양 관민(박규수)이 불태워 침몰 |
| 1866. 9 | 병인양요 (프랑스) | 병인박해를 구실로 로즈 제독의 프랑스군 침입 한성근(문수산성)·양헌수(정족산성) 부대가 격퇴 (퇴각 시 외규장각 의궤 약탈) |
| 1868. 4 | 오페르트 도굴 사건 |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통상 요구를 위해 충남 예산의 대원군 아버지 남연군 묘 도굴을 시도하다 미수에 그침 (통상 거부 의지 더욱 강화) |
| 1871. 4 | 신미양요 (미국) |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구실로 로저스 제독의 미군 침입 광성보에서 어재연 장군 부대가 결사항전 끝에 전사(수자기 약탈), 미군 철수 후 전국에 척화비 건립 |
| 1875. 9 | 운요호 사건 (일본) | 대원군 하야(1873) 후 일본 군함 운요호가 강화도 초지진과 영종도를 불법 포격하며 개항 강요 |
| 1876. 2 | 강화도 조약 체결 | 일본과 맺은 한국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자 불평등 조약 (조·일 수호 조규) |
사료 포인트: 척화비와 강화도 조약 조문 심층 해독
신미양요 직후 건립된 척화비(1871)와 개항을 연 강화도 조약(1876)의 핵심 조항은 시험에서 매번 대조 출제됩니다.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는 것은 곧 화친하는 것이요(洋夷侵犯 非戰則和),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主和賣國)."
정답: ④
해설: '거중조정'과 '최혜국 대우', '관세 부과' 조항이 처음 들어간 조약은 1882년 미국과 체결한 '조·미 수호 통상 조약'입니다. 강화도 조약(1876)에는 해안 측량권과 영사재판권이 포함되었고 부속 통상 장정에는 무관세·무제한 곡물 유출이 규정되었습니다.
핵심 요약
- ✓흥선대원군은 비변사 폐지, 경복궁 중건으로 왕권을 강화하고 호포제, 사창제, 서원 철폐로 삼정을 개혁했다.
- ✓병인양요(1866, 한성근·양헌수)와 신미양요(1871, 어재연)를 물리친 뒤 전국에 통상 거부 의지를 담은 척화비를 세웠다.
- ✓1875년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체결된 강화도 조약(1876)은 한국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자 불평등 조약이었다.
- ✓강화도 조약은 부산·원산·인천 개항과 함께 해안 측량권, 영사재판권(치외법권)을 허용하여 주권을 침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