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발전: 4·19 혁명부터 6월 민주항쟁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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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에 맞선 시민의 함성: 4·19 혁명(1960)과 유신 반대 투쟁
대한민국 헌정사는 집권 세력이 장기 집권을 위해 헌법을 뜯어고치려 할 때마다 시민과 학생들이 피 흘려 민주주의를 되찾아온 위대한 역사이기도 합니다.
한국 현대사 3대 민주화 운동(4·19 / 5·18 / 6월 항쟁) 완벽 비교
10·26 사태 직후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 세력이 12·12 군사 반란(1979)으로 군권을 장악하고 시민들의 민주화 열기('서울의 봄')를 짓밟으면서 5·18 민주화운동(1980)과 6월 민주항쟁(1987)이 일어났습니다.
| 비교 항목 | 4·19 혁명 (1960) | 5·18 민주화운동 (1980) | 6월 민주항쟁 (1987) |
|---|---|---|---|
| 저항 대상 | 이승만 정부 (자유당 독재) | 전두환 신군부 세력 | 전두환 정부 (제5공화국) |
| 직접적 원인 (도화선) | 3·15 부정선거, 마산 김주열 열사 시신 발견 | 12·12 사태 및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 공수부대의 잔혹한 진압 |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1월), 4·13 호헌 조치(직선제 개헌 거부), 이한열 열사 최루탄 피격(6월) |
| 핵심 구호 및 전개 | *"부정선거 다시 하라"*, 대학교수단 시위("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 | *"비상계엄 철폐하라"*, 광주 시민군 조직, 전남도청 사수 항전, 주먹밥 나눔 공동체 | *"호헌 철폐, 독재 타도"*, 국민운동본부 결성, 6·10 국민대회 및 넥타이 부대 동참 |
| 역사적 결과 및 개헌 | 이승만 하야 내각책임제·양원제 개헌, 장면 내각 출범 | 신군부의 무력 진압 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설치, 7년 단임 간선제 개헌 | 6·29 민주화 선언 항복 수용 5년 단임 대통령 직선제 개헌 (현행 제9차 개헌) |
사료 포인트: 4·13 호헌 조치와 6·29 민주화 선언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폭발과 승리를 보여주는 핵심 사료를 확인해 봅시다.
"나는 오늘 거듭되는 국론 분열과 혼란을 막기 위해 현행 헌법에 따라(체육관 선거로) 후임자에게 정부를 이양할 것이며, 평화적 정부 이양과 서울 올림픽 양대 국가 대사를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해 소모적인 개헌 논의를 지양할 것을 선언합니다."
국민의 간절한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를 묵살하고 기존 간선제 헌법을 지키겠다고 발표한 4·13 호헌 조치는 박종철 고문치사 은폐·조작 폭로(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및 연세대생 이한열 최루탄 피격 사건과 맞물려 500만 시민이 참여한 6월 민주항쟁의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여야 합의하에 조속히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하고, 새 헌법에 의한 대통령 선거를 통해 1988년 2월 평화적 정부 이양을 실현해야 한다."
시민들의 거센 항쟁에 굴복한 여당 대표 노태우가 발표한 선언으로, 여야 합의로 현행 5년 단임 대통령 직선제 헌법이 탄생했습니다.
정답: ③
해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호헌 철폐(4·13 호헌 조치 반대)', '직선제 개헌 쟁취'는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핵심 키워드입니다. 6월 민주항쟁의 결과 6·29 선언이 발표되고 현행 헌법인 5년 단임 대통령 직선제 개헌(9차 개헌)이 이루어졌습니다.
핵심 요약
- ✓4·19 혁명(1960)은 3·15 부정선거에 맞서 시민과 학생의 힘으로 이승만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고 내각책임제 개헌을 이끌어냈다.
- ✓박정희 정부의 10월 유신(1972)은 통일주체국민회의 간선제와 긴급조치권을 통한 권위주의 체제로, 부마 민주 항쟁과 10·26 사태로 종식되었다.
- ✓5·18 민주화운동(1980)은 전두환 신군부의 12·12 사태와 비상계엄 전국 확대에 맞서 광주 시민들이 결사항전한 숭고한 민주화 운동이다.
- ✓6월 민주항쟁(1987)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4·13 호헌 조치에 맞서 일어나 현행 5년 단임 대통령 직선제 헌법을 쟁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