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세의 침략 극복과 무신정변
유물과 표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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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3대 북방 민족 항쟁사 (거란 · 여진 · 몽골)
고려는 북진 정책과 다원적 국제 질서 속에서 북방 유목 민족인 거란(요), 여진(금), 몽골(원)의 잇따른 대규모 침략을 특유의 외교력과 끈질긴 군사 항쟁으로 이겨냈습니다.
| 침략 세력 (시기) | 침입 단계 및 주요 배경 | 고려의 대응 및 영웅·전투 | 역사적 결과 및 문화유산 |
|---|---|---|---|
| 거란 (요) (10~11세기 초) | - 1차(993): 송과의 단교 및 고구려 옛 땅 반환 요구 - 2차(1010):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침입(개경 함락) - 3차(1018): 강동 6주 반환 요구 침입 | - 1차: 서희(徐熙)의 외교 담판으로 피 흘리지 않고 강동 6주 획득 - 2차: 양규 장군의 맹활약 - 3차: 강감찬 장군의 귀주 대첩(1019) 대승 | 개경 주위에 나성(羅城) 축조, 압록강~도련포에 천리장성 축조, 초조대장경 조판, 고려·송·거란 세력 균형 |
| 여진 (금) (12세기 초) | 완안부 중심 부족 통일 후 고려 국경 침범 | 윤관(尹瓘)의 건의로 기병 중심 특수 부대 별무반(신기군·신보군·항마군) 창설 여진 정벌 후 동북 9성 축조(1107) (1년 뒤 반환) | 이후 여진이 금(金)을 건국하고 사대 요구 이자겸이 수용(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1135] 배경) |
| 몽골 (원) (13세기, 1231~1270) | 몽골 사신 저고여 피살 사건을 구실로 약 40년간 6차례 이상 침입 | - 1차 침입 시 박서의 귀주성 전투 - 최우 무신 정권이 강화도로 천도(1232)하여 장기 항전 - 김윤후가 처인성 전투에서 적장 살리타 사살, 충주성에서 노비 문서를 불태우며 하층민과 승리 - 개경 환도(1270)에 반발한 삼별초(배중손·김통정)가 강화도 진도(용장성) 제주도(항파두리성)로 옮기며 끝까지 항전 | 황룡사 9층 목탑·초조대장경 소실, 부처의 힘으로 국난을 극복하고자 강화도에서 팔만대장경(재조대장경) 판각 완성 |
무신정변(1170)과 최씨 무신 정권, 하층민의 봉기
12세기 문벌 귀족 사회의 모순이 심화되어 이자겸의 난(1126)과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1135, 김부식 진압)이 일어났으나 지배층은 반성하지 않고 문신 우대·무신 차별 정책을 지속했습니다. 마침내 1170년 의종의 보현원 행차 도중 정중부·이의방·이고 등 무신들이 정변(무신정변)을 일으켜 문신들을 숙청하고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사료 포인트: 서희의 외교 담판과 공민왕의 반원 자주 개혁(14세기)
거란 1차 침입 당시 서희의 담판과, 원 간섭기를 끝낸 공민왕(재위 1351~1374)의 개혁 사료를 확인해 봅시다.
거란의 침입 목적이 영토가 아니라 '고려와 송의 군사 동맹 차단'에 있음을 간파하고 강동 6주를 얻어낸 한국 외교사의 백미입니다.
원(몽골)이 쇠퇴하고 명나라가 흥기하는 국제 정세 변화를 틈타 공민왕은 과감한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정답: ③
해설: 윤관의 건의로 별무반을 편성하여 여진을 정벌하고 동북 9성을 축조한 것은 12세기 초(숙종·예종 대)의 사실입니다. ①, ②, ④와 정방 폐지, 몽골풍 금지, 성균관 정비 등은 모두 14세기 중엽 공민왕의 반원 자주·왕권 강화 개혁입니다.
핵심 요약
- ✓고려는 거란의 침입을 서희의 외교 담판(강동 6주)과 강감찬의 귀주 대첩(1019)으로 물리치고 천리장성과 개경 나성을 쌓았다.
- ✓여진의 침입에 맞서 윤관이 별무반을 이끌고 동북 9성을 개척했으며, 몽골의 침입에는 강화도 천도와 처인성 전투(김윤후), 삼별초 항쟁으로 맞섰다.
- ✓1170년 무신정변 이후 최충헌(교정도감·도방)과 최우(정방·삼별초)의 최씨 무신 정권이 이어졌고, 망이·망소이의 난과 만적의 난 등 하층민 봉기가 일어났다.
- ✓14세기 공민왕은 기철 숙청, 정동행성 이문소 폐지, 쌍성총관부 무력 수복, 신돈 등용 및 전민변정도감 설치로 반원 자주 개혁을 단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