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장 독립 전쟁과 신간회 좌우합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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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만주 무장 독립 전쟁의 연대기 (봉오동 청산리 3부 결성)
1919년 3·1 운동을 통해 평화적 시위만으로는 일제를 몰아낼 수 없음을 깨달은 애국 청년들은 만주와 연해주로 건너가 무장 독립군 부대를 조직하고 국내 진공 작전을 펼쳤습니다.
민족유일당 운동과 국내 최대 합법 좌우합작 단체 '신간회(1927~1931)'
1920년대 중반 국내에서는 일제의 문화 통치에 타협하여 식민 지배를 인정하고 자치권만 얻자는 타협적 민족주의자(이광수, 최린 등의 자치론)가 고개를 들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치안유지법(1925)으로 사회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이 동시에 가혹한 탄압을 받았습니다. 또한 중국의 제1차 국공합작과 국외 민족유일당 운동, 6·10 만세 운동(1926, 순종 인산일 계기 학생·민족·사회주의 연대 경험)에 자극받아, 사회주의 진영이 「정우회 선언」(1926. 11)을 발표해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과의 제휴를 제안하면서 1927년 2월 국내 최대 규모의 합법적 좌우합작 항일 단체인 '신간회(新幹會)'가 창립되었습니다(초대 회장 이상재, 부회장 권동진, 여성 자매 단체는 근우회).
| 구분 | 신간회(新幹會, 1927~1931)의 핵심 특징 및 활동 |
|---|---|
| 결성 주체 |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신채호·안재홍·이상재 등) + 사회주의 세력(정우회 선언) 연대 |
| 조직 규모 | 전국 및 일본·만주에 140여 개 지회, 회원 약 4만 명을 보유한 일제 강점기 최대의 합법적 사회운동 단체 |
| 3대 강령 | 1. 우리는 정치적·경제적 각성을 촉진한다. 2. 우리는 단결을 공고히 한다. 3. 우리는 기회주의(타협적 자치론)를 일체 부인한다. |
| 주요 활동 | - 순회 강연회를 통한 민중 계몽, 한국인 본위의 교육 및 착취 기관 배격 - 원산 총파업(1929), 갑산 화전민 사건 등 노동·농민·청년·여성(근우회)·형평 운동 적극 지원 - 광주 학생 항일 운동(1929. 11) 발발 시 현지에 즉시 '진상조사단'을 파견하고 민중대회를 계획하여 전국적 항일 운동으로 확산시킴 (이로 인해 집행부 대거 검거) |
| 해소(1931) | 새로 선출된 김병로 등 온건 지도부가 합법 테두리 내 타협 노선을 보이자, 코민테른의 좌경화 지침을 받은 사회주의 세력이 '해소론(발전적 해체)'을 주장하여 1931년 5월 전체 대회에서 해소됨 |
사료 포인트: 정우회 선언(1926)과 1930년대 초 한·중 연합 작전
신간회 창립의 기폭제가 된 정우회 선언과,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전개된 1930년대 전반 한·중 연합 무장 투쟁을 사료와 함께 정리합니다.
이 선언을 계기로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손을 잡고 신간회와 여성 단체 근우회(1927)를 결성했습니다.
1931년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키자 중국인들의 반일 감정이 고조되면서 만주의 독립군은 중국군과 연합하여 일본군을 격파했습니다.
정답: ②
해설: 신간회(1927~1931)는 자치론(기회주의)을 철저히 배격하고, 정우회 선언(1926)을 계기로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 연대하여 결성한 국내 최대의 합법적 좌우합작 단체입니다. 광주 학생 항일 운동(1929) 때 진상조사단을 파견했습니다. ③은 한인애국단, ④는 양세봉의 조선혁명군입니다.
핵심 요약
- ✓1920년 봉오동 전투(홍범도)와 청산리 대첩(김좌진·홍범도)은 독립군이 일본군 정규군을 대파한 빛나는 승리였다.
- ✓간도참변과 자유시참변의 시련을 이겨낸 독립군은 만주에 자치 정부 성격의 3부(참의부·정의부·신민부)를 결성하고 3부 통합 운동을 펼쳤다.
- ✓신간회(1927~1931)는 자치론(기회주의)에 맞서 비타협적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세력이 연합한 국내 최대의 합법 항일 단체였다.
- ✓신간회는 전국 강연회, 노동·농민 운동 지원 및 광주 학생 항일 운동(1929) 진상조사단 파견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치다 1931년 해소되었다.